지금 사방에 꽃 터지기 시작했다. 남쪽에서는 이미 복수초 눈 속에서 터졌고, 변산바람꽃 개화 소식 들렸다가 멀어진지도 오래 되었다. 노루귀, 현호색, 산괴불주머니... 숲의 가장 낮은 자리를 제 삶의 자리로 부여받은 풀들 모두 늦추위 아랑곳하지 않고 제 꽃 피워내고 있다. 2월 하순에 제주 어느 호텔 정원에서 본 매화는 벌써 섬진강 자락을 넘더니 남한의 중심 지점에 자리한 나의 산방 마당에 까지 번졌다. 살구꽃과 복사꽃의 분홍이 바통을 받고, 벚나무 연분홍도 곧 차례를 이을 게다.

살아 온 날이 반 백 년 가까운데, 아직도 나는 이 계절이면 흔들리는 마음 일어서며 환장할 것 같다. 사계절 피는 꽃 중에 봄꽃은 기껏 15% 남짓에 불과한데 꽃 때문에 마음 흔들리는 심정의 비율은 이 계절이 100이다. 서울에 살 때야 도시가 회색이어서 그랬다 하지만, 산중에 산 지 어느새 8년을 향하고 있는데도 나는 이 계절을 잘게 나누어 피어나는 각양각색의 꽃들을 그 시간에 따라 하나하나 만나면서 해마다 날마다 설레며 살고 있다.

내가 이 계절의 개화에 온 마음을 빼앗기기 시작한 게 언제부터인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유년이나 소년의 시절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차츰 나이가 들어갈수록 꽃피는 춘삼월에 마음을 빼앗겨 괜스레 바깥을 서성이는 경험이 짙어져 왔다. 바라만 보아도 가슴이 뛰던 첫사랑 여인을 만나고 또 그녀로부터 홀로 남겨져야 했던 계절이 봄이었기 때문이었을까? 대학과 대학원을 다니던 그 청춘의 시절부터 나는 벚꽃이 만개하는 시절을 좀처럼 감당하지 못했었다. 이후 군복무 시절에야 그럴 틈이 없었다. 하지만 직장인이 된 뒤 그 육중하고 삭막했던 도시 공간 서울에서도 나는 이 계절이면 봄꽃을 만나러 북한산과 도봉산, 수락산 일대를 주말마다 오르곤 했다.

하지만 정작 지금처럼 깊게 봄꽃과 이 계절에 마음을 내맡기게 된 것은 서른 몇 해, 한 아이의 아버지가 되고 나서부터였다. 그러나 단순히 아이의 아버지가 된 것이 명확한 계기라고는 할 수 없다. 가만 생각해 보면 더욱 분명한 계기가 존재한다. 그 선명한 계기는 꽃을 바라보는 나의 눈이 바뀌기 시작하고부터였다. 한 아이의 아버지가 된 것은 간접적인 계기라 할 수 있다. 아이의 성장과 함께 하는 시간은 생명에 대한 나의 눈을 확장시켰다. 나는 아버지가 되고부터 꽃을 단순히 꽃으로만 대하지 않게 되었다. 꽃을 단순히 꽃으로만 대하던 시각을 닫고, 꽃을 나나 내 아이와 다르지 않은 생명들로 느끼기 시작했다. 겨우내 꽃눈을 머금고 혹한과 폭설을 견뎌낸 뒤 가장 이른 봄에 피워내는 식물들에게서 무한한 기쁨을 만나게 된 보다 구체적인 계기는 그 꽃의 입장이 되어 보는 시간을 자주 갖기 시작하면서 부터다. 어떤 날부터인가 나는 꽃을 아이를 바라보듯 바라보기 시작했다. 내 삶의 어느 한 면을 바라보듯 꽃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렇게 하자 꽃 한 송이에 얼마나 큰 생명의 분투가 담겼는지를 자연스레 느끼게 되었다. 또한 그들 저마다에 내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삶의 욕망이 담겨 있음도 알게 되었다. 내가 더 어리고 젊었던 날에 꽃과 봄에게 빼앗긴 마음이 단순히 양기가 뭉치고 터지면서 느꼈던 자연스런 설렘 같은 것이었다면 이때부터 갖게 된 설렘은 풀 한포기, 나무 한 그루의 일생에 깃든 경이로운 삶의 모습을 느끼며 얻게 된 감동의 설렘이라 할 수 있다. 긴 겨울을 어떻게든 견뎌낸 녀석들의 결실에 대한 열망이 꽃이요 제 삶에 찾아든 시리고 추운 고난의 시간을 건너낸 녀석들의 환호이자 아우성이 꽃이라는 점을 진심으로 느끼면서부터였다.

그 이후 꽃에 대한 내 인식의 폭은 더욱 확장되어 갔다. 꽃피워내는 식물들의 삶의 꼴을 유심히 살피다가 나는 식물 전체를 삶에 대한 강렬한 의지를 지닌 존재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이를테면 모든 생명이 신이 부여한 제약과 선물을 받아들고 제 선물로 한계를 넘어서기 위해 살아가고 있음을 알아가게 되었다. 태어나고 자라고 이루고 갈무리하며 되돌아가는 인간 삶의 긴 사이클처럼 풀 한포기 나무 한그루에도 똑같은 생장수장(生長收藏)의 사이클이 돌아가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또 그 사이클이 생명을 지배하는 보편적 법칙 아래서 운행되고 있음도 자연스레 깨치게 되었다. 지금부터 잠깐 꽃을 만나며 깨우친 그 이야기를 할 것이다. 집중해서 읽어보자! 앞으로 그대의 꽃 산책에 아주 중요한 열쇠와 놀라운 기쁨을 선사할 이야기가 될 것이다.

모든 생명은 제 태어나는 시간과 조건을 선택할 수 없다. 동·식물 모두가 그렇다. 어느 시간대, 어느 환경에서 태어날 것인가를 선택할 수 있는 생명이 없다는 말이다. 이것을 나는 숙명(宿命)이라 부른다. 즉 누군가가 부여해 놓은, 제 힘으로는 결코 바꿔낼 수 없는 본래의 명령이 바로 태어나는 것을 선택할 수 없다는 것이다. 또한 식물은 누구도 스스로 움직일 수가 없다. 그것이 식물들에게 부여된 신의 형벌이다. 하지만 식물들은 동물이 갖지 못한 놀라운 선물을 받고 태어난다. 무엇일까? 제 스스로 밥을 만들 수 있는 능력이 바로 그것이다. 그들은 광합성을 할 수 있다. 물과 공기 속 이산화탄소와 햇빛을 버무려 밥을 지을 수 있는 능력이 그들에게는 있다. 생각해 보라. 그대에게도 이런 능력이 있다면 어떻겠는가? 어떤 이는 내일 당장 직장을 때려칠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얼마나 부러운 선물인가!

한편 동물은 식물과 달리 움직일 수 있는 능력과 자유를 선물처럼 부여받고 태어난다. 하지만 그들은 스스로 밥을 만들 수 없다. 모두 누군가 타자를 잡아먹으며 살아야 한다. 정말 참혹한 형벌이다. 오늘 아침 그대는 누구를 취해 끼니를 채웠는가? 그래서 동물의 세계에는 피 흘려야 하는 상황이 늘 배치되어 있다.

다른 한편 인간이라는 동물에게는 어떤 선물, 어떤 형벌이 부여되었을까? 나는 그것을 ‘사유능력’이라고 본다. 우리는 생각을 할 수 있는 능력을 부여받아 이렇게 눈부신 문명과 문화를 키워왔다. 동시에 그것 때문에 우리는 또한 불행하다. 다가오지 않은 미래를 걱정하거나 이미 지나간 시간을 후회하느라 지금 여기를 살지 못하는 날이 얼마나 많던가? 모든 깨달은 이들이 말하는 행복의 비결이 ‘지금 여기 이 순간을 살라’는 가르침으로 집중되는 것을 생각해 보면 ‘사유능력’에 대한 나의 선물-형벌론에 더욱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생명의 모든 주체들은 태어나는 것을 선택할 수 없다는 공통의 숙명과 저마다의 형벌과 선물을 부여받고 제 삶을 시작한다.

나는 이른 봄 꽃 중에 복수초(福壽草)를 특별히 좋아한다. 이름처럼 인간에게 복과 장수를 주는 꽃이라고 믿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그들의 삶에 담긴 역경과 그것을 극복하며 꽃피우고 결실을 맺어내는 놀라운 지혜 때문이다. 제주에서는 복수초가 1월에도 핀다. 남쪽에서는 2월, 서울을 비롯한 중부지방에서는 3월이나 4월 초 까지 꽃을 피운다. 그들 꽃피울 때 주변은 춥다. 여전히 눈이 내리는 시간이거나 잔설이 남아 있는 시간에 꽃을 피우는 때가 많다. 그래서 그 즈음 다른 키 큰 나무들 대부분은 새잎을 내지 않는다. 그런데 녀석들은 왜 하필 이렇게 추운 때를 택해 꽃을 피울까? 얼어 죽지는 않을까? 그들이 꽃피운다고 그 추운 때에 누가 꽃가루받이를 매개하기는 하는 걸까?

복수초는 키 작은 부모를 두었다. 그리고 아직 추운 시간대에 태어나는 숙명을 지녔다. 이는 선택할 수 없는 유전이요 숙명이다. 때로 줄기가 한 자 가까이 키를 키우는 녀석들도 있지만, 대부분 지면에 가까운 키로 태어난다. 녀석들은 어떻게 이 형벌과도 같은 조건을 극복해 낼 수 있을까? 복수초는 아주 특별한 꽃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제약을 넘어선 식물이다. 복수초의 꽃은 황금처럼 빛나는 노란색이다. 꽃잎과 암술 수술 모두 노란색을 띤다. 물론 꽃받침은 흙색에 가깝지만 위에서 보면 다른 색이 보이지 않는 구조다. 오직 노란색뿐이다. 이 노란색이 바로 눈 속에서도 꽃을 피우고, 또 곤충매개자를 불러들이는 비밀이다. 복수초의 노란색 꽃은 햇빛이 비치면 활짝 제 꽃을 편다. 날이 흐리면 꽃잎을 열지 않는다. 해가 지면 꽃잎을 모은다. 복수초는 꽃을 열어 태양열을 그 안에 모으는 능력을 가졌다. 그래서 꽃 안이 밖보다 대략 5도가량 높은 온도를 만든다. 비록 추운 때, 눈 속에서도 꽃을 피우지만, 이 오목 거울 역할을 하는 노란빛으로 태양열을 모아내는 삶의 능력을 개발함으로써 그들은 곤충을 부를 수 있다. 아직 겨울인데 무슨 곤충이 있냐고? 천만에! 무당벌레처럼 성충인 상태에서 겨울을 건너는 곤충들이 숲에는 제법 있다. 그들에게 5도 정도의 온도 차는 충분히 매력적이다. 성충인 채로 겨울을 건너는 곤충들에게 복수초 꽃 안은 기꺼이 찾아들고 싶어지는 공간이다.

생강나무는 또 다른 모습으로 자기 형벌을 극복했다. 잎과 가지, 꽃에서 생강 향이 나는 나무라서 붙여진 이름이다. 녀석들은 대부분 우거진 숲에서 싹튼다. 그리고 볼품없이 수수한 크기의 노란색 꽃을 피우는 녀석들이다. 생강나무 역시 숲의 다른 나무들이 잎을 내지 않았을 때 제 꽃을 피운다. 잎도 내지 않은 상태에서 꽃을 먼저 피운다. 그래서 아직 무채색인 이른 봄, 숲의 하층부에 제 꽃 색만 드러나게 한다. 식물에게 잎은 밥을 만드는 대단히 중요한 부위다. 그런데도 녀석들은 잎을 내지 않은 상태에서 꽃을 먼저 피운다. 왜일까? 이유는 제 볼품없는 꽃을 극복하기 위해서이다. 다른 나무들이 잎을 쏟아내는 시기에 꽃을 피우면 그 잎들에 자신의 수수한 꽃이 묻힐까봐, 결국 매개 곤충 눈에 띨 확률이 낮아지는 것을 막기 위해 그런 선택을 하고 있다.

다른 생명들이 모두 그러하듯 복수초도 생강나무도 바꿀 수 없는 삶의 조건은 그냥 받아들인다. 오직 바꿀 수 있는 것에 집중하여 자기 한계를 넘어선다. 그들의 꽃은 그래서 한계를 넘어서며 피는 꽃들이다. 어디 그들의 꽃만 그러하겠는가? 내가 미처 헤아리지 못한 삶의 꼴이 있을 뿐, 숲에 피는 모든 꽃들 속에서 나는 저마다의 열망과 분투가 담겨 있음을 느낀다. 이제 사방으로 번져오를 저 봄꽃들의 모든 개화는 겨우내 지켜낸 욕망이 터지는 모습이다. 동백처럼 눈 속에서 피는 꽃도 있고, 산국이나 감국처럼 늦가을 서릿발을 기다려 제 꽃을 피우는 식물의 욕망도 있으니 눈물겹지 않은 개화가 없다. 하지만 지금의 개화는 바로 겨울을 견디고 건너낸 욕망이다. 혹한과 폭설로 백스무 몇 날을 얼어붙어 있어야 했던 그 동토 속에서 담담히 품고 굳건히 지켜낸 풀과 나무들의 그리움이 터지는 욕망이다. 간절하고 강인함이 빚어낸 고귀한 실존이요 언 땅 속의 고통을 오직 견디고 건너낸 생명들의 눈부신 향연이다. 땅 속에 품었던 그리움들이 하나하나 허공을 밝히는 한낮의 별로 터져 나오는 순간이다.

하여 나는 겨울을 견디고 피어나는 봄꽃에 더욱 환장한다. 이는 그저 꽃구경하며 신나하고 즐거워하던 젊은 시절의 눈이 아닌 대등한 생명의 눈으로 보면서 갖게 된 마음이다. 그러니 그대도 꽃과 하나가 되라. 올 봄에는 그들의 마음을 들여다보라. 그들의 삶을 헤아려 보라. 단순한 설렘을 넘어 더 깊은 기쁨, 더 깊은 힐링을 선물 받을 것이다. 번져오는 꽃이 지성에게 말한다. 이제는 눈으로 보는 것에 머물지 말라고, 가슴으로 꽃을 만나라고.

월간 <VOGUE> 4월호에 기고한 칼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