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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다만 나이고자 한다 - 상(像)을 반대하며
  글쓴이 : 여우숲 (116.♡.7.31)     날짜 : 17-05-04 23:26     조회 : 466    

 

어제 충남 홍성을 거쳐 부산에 내려왔고 이곳에서 한 밤을 보냈습니다. 홍성에서는 충청남도 공직자들과 지역주민들을 만나 좋은 삶을 주제로 강연했고 부산에서는 유치원의 학부모들에게 좋은 부모의 길에 대해 강연했습니다. 오후 이 지역에서 선생님들을 만나 강연할 일정을 기다리며 이곳에 사는 중년의 제자와 짧은 부산 여행을 하기로 해놓고 숙소에서 제자를 기다리며 늦은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이렇게 보내는 날들 속에서 나는 가만 생각하곤 합니다. ‘어쩌다 내가 이렇게 큰 복을 얻었나? 참 감사한 일이다. 여행하며 강연으로 밥을 얻고, 밥을 얻으며 또한 누군가의 마음을 일으키고 움직일 수 있는 이 자유하고 자연스러운 직업, 비록 이 직업으로 큰돈을 허락받지는 못했으나 얼마나 나와 잘 맞고 또한 기쁜 삶인가?’

 

그리고 이따금 이런 내 삶을 신기해합니다. 나는 내 삶의 중년이 이렇게 펼쳐질 것이라고 예상해 본 적이 없습니다. 우선 나는 학교에서 이런 삶을 위한 학문을 전공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쓰는 책과 강연의 주제가 나의 학창시절 전공에 기반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지요. 또한 도시와 직장을 떠나 숲으로 떠나올 때도 글을 쓰고 책을 내겠다는 구상을 갖고 있지 않았습니다. 방송에 출연하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 적은 더더욱 없었습니다. 그런데 나는 글을 쓰고 그것을 기반으로 여행하면서 강연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참으로 신기한 일 아닌가요?

 

의도하지 않은 결과로 살아가고 있는 이 상황에 대해 나는 가만히 생각해 보았습니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그리고 어느날 알아챘습니다. ‘내 안의 씨앗! 그것 안에 이 삶이 담겨 있었겠구나.’ 씨앗에 대해 잘 아는 농부나, 숲에 사는 식물의 종자에 대해 잘 아는 전문가들이야 그 씨앗만 보고도 이게 어떤 곡식의 씨앗인지, 어떤 식물의 종자인지 척하고 알아채겠지만 정작 해당 곡식이나 식물의 씨앗은 저 자신이 어떤 모양으로 자라고 어떤 빛깔과 향기와 모양으로 피어나는 꽃을 가졌는지, 그 결실은 또한 어떠할지를 모를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의 삶도 그 씨앗 당사자들과 같은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내가 어떤 삶을 살지 그 빛깔과 향기와 모양이 어떠할지는 모르고 사는 것 아닐까요?

 

지난주에 나는 전북의 한 교육기관에 출강했습니다. 그곳의 원장님과 정성 가득한 급식을 함께 나누고 향기로운 차를 나누는 등 환대를 받았습니다. 무엇보다 귀중한 말씀 한 자락도 얻었습니다. ‘얼마 전 유럽으로 연수를 다녀왔습니다. 학교 현장을 둘러보며 나는 정말 많은 것을 느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우리 교육이 앞으로 얼마나 각고의 노력을 기울여야 할지 무거운 책임감도 갖고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한 초등학교에 들러 나는 멋진 수업을 참관했는데 수업이 끝나고 내가 그곳 선생님께 이렇게 물어보았습니다. “이 학교가 아이들에게 기대하고 있는 상()은 무엇인가요?” 선생님은 잠시 당황해 하며 한참 생각을 하다가 이렇게 대답했어요. “우리는 특별히 그런 것을 세워두고 교육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질문의 취지에 맞는 무엇인가를 우리가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아이들 저마다대로정도가 아닐까 싶네요.” 대답을 듣고 그런 질문을 한 것이 부끄러워지더군요.’

 

그 원장님의 말씀을 듣다가 선명한 장면 몇 개가 내 머릿속에 떠올랐습니다. ‘멸공방첩’,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 ‘○○중학교의 인재상’ ‘급훈 어쩌구초등학교 시절부터 고등학교 때까지 내가 학교 담장이나 건물 입구, 교실에서 본 슬로건 들입니다.

 

그대는 어땠는지 모르지만 나는 내 인생의 전반부를 그 영향 속에서 자유롭지 못하고 살았던 것 같습니다. 친절하게도 누군가 내게 바라는 상()을 슬로건이나 다른 방법으로 내걸어주었지요. 나는 자연스레 제시된 형상에 가까워지는 것이 좋은 삶이라고 오해하며 살게 된 것이지요. 뒤늦게 자각한 것이 얼마나 다행한지 모릅니다. ‘각자 저마다대로사는 것이 진짜 좋은 인생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이후 나는 나에게 가까워지고자 노력했습니다. 열망하고 그래서 도모하고 그래서 넘어져보고 그래서 다시 일어나 걸어보고 또 넘어져보고 하지만 다시 일어나 기쁨을 향해 다시 비틀대며 걸어가는.

 

여전히 나는 그 과정을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종종 기쁘고 그래서 종종 아프지만 나는 놓치지 않으려 애씁니다. ‘나는 어떠한 상()에 가깝고 싶지 않다. 다만 나는 늘 나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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