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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기고유성을 마주하기 위해 겪어야 하는 과정
  글쓴이 : 김용규 (115.♡.202.238)     날짜 : 15-03-13 00:03     조회 : 938    


지난해 가을 한 케이블 방송이 나의 강의를 동행 취재한 적이 있었습니다. 거절하기 어려운 사연이 있어 촬영을 허락하긴 했는데 나는 그 촬영이 어떻게 편집되었고 어떻게 방송됐는지 본적이 없습니다. TV에서 나를 보았다는 인사를 몇 달째 간간히 듣고 있어 그때 촬영분이 반복 노출되고 있나보다생각하곤 했습니다. 그 방송을 보고 나를 만나자 하신 분들도 몇 있습니다. 

오늘 나는 그 중 한 분을 이곳 여우숲에서 만났습니다. 그분은 부인과 함께 버스를 타고 오셨습니다. 4반세기를 ()武藝(무예), 명상으로 수행해 오신 분이었습니다. 회갑을 훌쩍 넘긴 몸과 얼굴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젊고 맑고 기품 있었습니다. 점심 식사부터 조금 전까지 열 시간 가까운 시간을 함께 했는데 한 번도 흐트러진 모습 없는 자세를 유지하는 분이었습니다. 부인은 시와 소설을 짓는 작가분이셨습니다. 

방송에 무슨 내용이 나가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두 분은 나의 안내를 통해 숲을 보는 새로운 눈을 열고 싶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함께 숲을 거닐었습니다. 나는 숲 입구에서 만난 가시엉겅퀴의 뿌리 잎 앞에 쪼그리고 앉았습니다. 그 녀석이 왜 그렇게 가시를 단 채 땅바닥에 온 몸을 밀착하고 이 계절을 지나고 있는지 그 녀석의 사는 꼴을 헤아려 설명해 주었습니다. 본격 잎을 터트리기 시작한 산마늘(명이나물)이 왜 이토록 추운 계절에 타자들의 침묵 속에서 저 홀로 잎을 틔워내고 있는지, 그 절박한 열망을 지키자고 산마늘은 또 무엇을 만들어 추위를 견뎌내고 있는지 그 꼴도 설명해 주었습니다. 

군락을 이뤄 자라는 낙엽송(일본잎갈나무)는 왜 사방 중에 한 쪽으로만 가지를 뻗고 있는지, 그것이 빽빽한 경쟁 속에서 서로가 살아가기 위해 터득한 그들이 이루어낸 놀라운 지혜임도 보여주었습니다. 바위 위에 떨어졌으나 그 바위를 끌어안음으로써 제 하늘을 열어내고 있는 느티나무의 대단함도 느끼도록 안내했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이 숲에 사는 나무와 풀들이 어떻게 제 삶을 지켜내며 또한 제 고유성을 확보해 가는지를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두어 해 전 불어댄 거센 바람에 뿌리가 뽑혀 쓰러져버린 거대한 낙엽송 한 그루 앞에 이르러 그의 죽음을 보시게 한 뒤 산방으로 들어와 차와 담소를 나누었습니다. 

부인께서 글을 쓰는 이유는 소외되고 고난 받는 사람들에게 그 어둠을 이겨낼 힘을 주고 싶어서라고 했습니다. 내가 숲의 생명을 소재로 그 일을 하는 것이라면 당신은 시나 소설로 그 일을 하고 계신 것이라 했습니다. 오늘 짧은 숲 산책에서 당신은 참 많은 영감을 얻었다고 했습니다. 예전에는 삶에서 고난과 고통이 없으면 좋을 국면이라 생각한 적이 있었는데 살아보니 그것이 삶에 놓여 지는 까닭이 있음을 분명히 알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나 역시 깊은 공감을 표했습니다. 우리가 숲에서 마지막으로 본 그 뽑혀 쓰러진 낙엽송을 보아도 그렇다고 부연했습니다. ‘그 낙엽송은 바로 옆에 심겨져 자신의 하늘을 다퉜던 낙엽 때문에 늘 빛이 모자라는 고난을 겪어야 했으나, 몇 해 전 간벌 때 그 옆 나무가 잘려나간 뒤 쓰러진 것입니다. 동아시아 사상에서는 음양과 오행으로 사물의 변화를 설명하는데, 그때 서로 간에 상생과 상극이 작용하는 관계도 포함합니다. 마지막으로 본 그 쓰러진 낙엽송은 바짝 붙어 자라는 나무가 자신을 극하는 존재여서 그것이 고난이나 고통을 주는 원인이었지만, 고통을 주던 나무가 사라지자 그것이 막아주던 바람이 걸림 없이 확 열린 자리로 불어치게 되었고 결국 큰 바람에 쓰러지고 만 것이지요.’ 

우리는 고난과 고통, 어려움이 힘겹지만 삶을 키우고 자신의 고유성을 얻어나가게 하는 강력한 에너지임을 공감했습니다. 4반세기의 수련을 통해 이룬 하나의 세계에도, 그 세월 넘게 몰두한 작가의 창작에도 고난은 에너지였을 것입니다. 십여 년 숲에 안겨 사는 내 삶이 그러하듯. 

다시 적막해진 밤 숲에서 나는 릴케의 한 구절에 다시 밑줄을 그어 어려움을 마주하고 있는 그대에게 보냅니다. “우리는 어려운 것에 집착해야 합니다. 자연의 모든 것들은 어려운 것을 극복해야만 자신의 고유함을 지닐 수 있습니다. 고독한 것은 어렵기 때문에 좋은 것입니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도 어렵기 때문에 좋은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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